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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국의 『순교자』, 전쟁 속 피어난 인간에 대한 사랑

특별 수록

by 대서 2020. 11. 15. 1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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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표지. 문학동네.

칼레의 시민

 오귀스트 로댕이 제작한 청동상 칼레의 시민은 리슐리외 공원에 세워진 뒤에서야 시청 앞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생각하는 사람으로 유명한 로댕의 동상이 왜 이런 수모를 당해야 했을까?

 칼레의 시민은 백년전쟁 당시 영국 군대에 포위당한 프랑스 칼레 시를 구하기 위해 6명의 시민 대표가 목숨을 바쳤다는 일화를 소재로 삼은 기념상이다. 칼레 시는 이들의 희생을 기리기 위해 로댕에게 조각상 제작을 의뢰했으나 완성된 조각상의 모습은 기대했던 모습과 사뭇 달랐다. 6명의 모습은 늠름하고 초인적인 영웅이 아니라 죽음 앞에서 좌절하고 고뇌하는 인간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한국 전쟁이 한창인 1952, 북한군에 끌려갔던 열두 명의 목사 중 신 목사와 한 목사만이 살아 돌아온다. 한 목사는 후유증으로 제정신이 아니었기에 멀쩡히 살아 돌아온 사람은 사실상 신 목사 한 명뿐이었다. 죽은 목사 열 명은 곧 순교자가 되었고 남한의 정치 선전 자료로 쓰이기 적합했다. 소설의 화자 이 대위는 두 목사가 어떻게 살아 돌아올 수 있었는지 알기 위해 신 목사를 찾아간다.

 

슬픔 속에서 살아가기 위해 

 백석 시인의 시 「흰 바람벽이 있어」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나는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아가도록 태어났다.

 인생에서 괴롭고 슬픈 일을 겪을 때 우리는 왜 하필 나에게 이런 시련이 찾아오는 것일까 절규하기도 한다. 우리에게 찾아오는 시련은 지난날 행적의 결과물일 때도 있지만 삶에 돌연 개입한 외부 요소들이 주는 고통일 때가 있다. 내 잘못으로 비롯된 슬픔은 나를 자책하며 반성하고 견뎌낼 수 있다. 그러나 손으로 만질 수도 눈으로 볼 수도 없는, 그저 불행이라고밖에 설명할 수 없는 고통을 만나면 인생은 내 의지대로 되는 게 아닌 것처럼 느껴지고 삶의 주인은 내가 아니라 누군가 마련해 놓은 운명의 쳇바퀴대로 흘러가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그럴 때 백석 시인은 슬퍼하는 자들을 이렇게 위로한다. “하늘이 이 세상을 내일 적에 그가 가장 귀해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라고. 만약 우리가 겪어야 하는 시련에도 사랑이라는 의미가 있다면 그런대로 살아갈 수 있게 된다. 우리를 괴롭게 하는 건 시련과 고통에 아무런 가치도 없다는 의심과 두려움이다.

 그러니 남은 자들이 살아가기 위해서는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 삶의 의미를 찾아야 한다. 로댕이 칼레 시민 여섯 명을 광휘가 느껴지도록 표현했더라면 생존한 시민들은 동상을 우러러볼 때마다 대의를 위한 희생정신에 가슴 벅찬 경험을 할 수도 있었다. 여섯 명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며 시민들은 살아남은 삶을 소중 히 여겼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로댕은 사람들이 바라는 의미를 주지 않고 죽음 앞에 선 인간의 절망을 사실대로 적시했다. 신 목사는 오귀스트 로댕과 달랐다. 그는 사람들에게 삶의 의미를 주고자 했다.

 신 목사는 우리가 지금 여기서 당하는 고통은 고통일 뿐 거기에는 우리가 이승 너머에서 찾아낼 어떤 정의로움도 없습니다라고 소리치는 이 대위에게 이렇게 말한다. “불쌍한 내 교인들, 전쟁과 굶주림과 추위와 질병, 그리고 삶의 피곤에 시달리는 이들을 내가 사랑할 수 있게 도와주시오. (중략)… 우린 그들에게 빛을 보여주어야 해요. 영광과 환영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고 하나님의 영원한 왕국에서 마침내 승리를 거둘 것이라는 확신을 주어야 합니다라고. 목사들이 고문당하고 죽어갈 때 신은 그들을 보살피지 않았다. 신 목사와 한 목사를 제외한 열 명의 목사들은 죽음의 문턱 앞에서 신을 부정하고 신앙심을 버렸다. 하지만 신 목사는 전쟁으로 절망하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심어주기 위해 그 모든 사실을 묵인하는 편을 택했다. 그에게는 진실보다 더 큰 인간에 대한 사랑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우리가 인간이기 때문에 희망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우린 절망에 대항해서 희망을 가져야 하오. 절망에 맞서서 계속 희망해야 하오. 우린 인간이기 때문이오. (257p)”

 

사랑은 삶을 유의미하게 만든다 

 신을 믿지 않는 목사의 기도는 누구에게 가닿을 것인가. 그 기도는 하늘이 아닌 땅과 이어져 있다. 사람들은 간절히 바라는 일이 있으면 자신의 신에게 기도를 올린다. 기도하는 사람은 내면을 통해 신이 아니라 그의 간절함을 본다. 실체가 없는 감정은 기도를 통해 형상화되고 마침내 그 끝에서는 신이 기도를 들어줄 것이란 희망을 마주한다. 신 목사가 믿는 것은 바로 그 희망이다. 무신론자에게 종교는 허상이다. 그러나 신 목사는 종교를 통해 희망의 싹을 보고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그 싹을 잘라버리지 않기로 결심했다.

 전쟁으로 고통받는 민간인들은 그들의 시련에 아무 책임도 없다. 죄 없는 사람들이 겪는 절망은 고통과 슬픔 그 자체일 뿐 거기에는 의미가 없다. 사랑하는 사람과 해후하고 고난의 행군을 보상받을 천국은 상상 속에나 있다. 하지만 죽은 자식을 사후세계에서 만나길 비는 아내에게 우리가 죽어서 갈 곳은 없다고 말해 준 신 목사는 그의 실언을 후회했다. 그는 아들이 순교자로 죽은 줄 아는 아버지에게 사실을 말해줄 수 없다고 아파한다. 결국 『순교자』는 진실을 둘러싼 공방전을 펼치고자 하는 소설이 아니다. 신 목사는 슬퍼하는 자들의 비참함을 사랑으로 감싸 안아 그들이 삶의 행진을 이어나가도록 한다. 『순교자』는 인간에 대한 사랑만이 삶을 의미 있게 한다고 말한다.

인간을 사랑하시오, 대위. 그들을 사랑해주시오. 용기를 갖고 십자가를 지시오. 절망과 싸우고 인간을 사랑하고 이 유한한 인간을 동정해줄 용기를 가지시오. (283p)”

 

 평양 철수 작전이 개시되어 남쪽으로 내려간 이 대위는 신 목사의 행방을 알기 위해 분투하지만 끝내 그를 찾지 못한다. 죽었다는 사람도 있고 만주 국경에서 봤다는 사람도, 서해안에서 봤다는 사람도 있다. 이 대위는 피난민 교인들을 바라본다. 그곳에는 북한에서 온 교인도 있고 본래 남한 사람인 자들도 있다. 그들에게는 이데올로기를 둘러싼 갈등도 폭력도 찾아볼 수 없다. 다만 그들은 북녘에 남아있는 형제들을 위해 기도하는, 전쟁의 폭격 속에서도 지지 않는 사랑을 가진 사람들이다. 이 대위는 홀가분한 마음으로 그들 틈에 섞여 들어간다.

 

 

[대서 홍수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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