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버팔로 66” 리뷰
사랑은 흔하다. 사랑은 여기저기 널려 있는 넝마이다. 그 보편적 감정은 가진 것 하나 없는 가난한 예술가에게도 하사된 공평한 자산이라 어떤 작가는 사랑 시를 짓고 어떤 감독은 로맨스 영화를 찍고 어떤 가수는 사랑 노래를 부른다. 이 거대한 오케스트라는 관객들이 부귀와 가난, 신분은 유한한 것이고 우리들의 영원한 재물은 사랑, 오직 사랑밖에 없다고 생각하게 만들었다.
사랑은 그 사랑이 부랑아의 사랑이어도, 감정선을 따라갈 수 없는 사랑이어도 그저 우리 마음속에 있는 공통된 감정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공감력을 드높인 후 우리들을 모든 걸 이해할 수 있는 천재로 만든다.
<버팔로 66>은 납치범과 피해자라는 끔찍한 관계를 창작 세계에 끌어들임으로써 그 관계를 서로만의 긴밀함으로 바꾸어 버린다. 그 긴밀함에는 사랑이 있다. 감독은 둘 사이에서 절대 자랄 수 없는 감정을 창조해 사랑에 대한 우리들의 공감력은 한계가 어디까지인지 현실에서 시험하려 든다. <버팔로 66>은 사랑이 온 세상 사람 마음에 핀 들꽃임을 이미 알고 있다.
사랑은 사람을 어떻게 구원하는가
창작물 속에서 등장인물의 성장을 촉진하는 매개체는 연인 간의 사랑이다. 성장물의 주인공들은 대개 아동기에 부모의 홀대를 받고 큰 내력이 있다. 그들은 자신의 운명적 상대를 만날 때까지 영원한 소년 혹은 영원한 소녀로 과거를 살아간다. 부모의 사랑으로 가득했어야 할 자리가 훗날 연인의 사랑으로 채워지길 기도하면서.
우리는 주인공 빌리의 어릴 적 사진을 통해 그의 과거를 처음 조우한다. 사진 속 빌리는 반려견을 끌어안고 환하게 웃고 있다. 그의 과거에는 문제가 없어 보인다. 푸른 잔디가 있는 마당에서 미소 짓고 있는 아이는 분명 외동으로 부모의 극진한 사랑을 받고 지냈으리라 예상된다. 그다음 화면에서 우리는 주인공의 현재를 본다. 빌리는 5년의 억울한 옥살이를 끝내고 방금 막 출소했다. 머리카락과 수염이 얼기설기 자라 조촐해 보이는 빌리는 우리가 방금 몇 초 전에 본 과거를 깨트려 버린다.
자신의 과거 사진을 본 빌리는 눈물 흘린다. 그 눈물은 전과자를 비참하게 만드는 행복하고 순진했던 어린이를 송별하며 흘리는 눈물이 아니다. 빌리는 사진 속 반려견을 보고 운다. 빌리가 강아지를 보고 흘리는 눈물은 자연스러운 헤어짐을 맞았을 때 흘릴 수 없는 눈물이다. 빙고라는 이름의 반려견은 언젠가 아버지가 내다 버린 강아지였다. 그 눈물은 어쩌면 아버지가 강아지를 버리지 않았더라면 반려견과 더 오래 함께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미련의 눈물이다. 매정한 아버지는 빌리가 과거에 집착하게 만든 근본적 원인이다.
가해자가 피해자의 마음을 모르듯 아버지가 빌리의 무너진 정신 상태를 알 리가 없다. 아버지는 식탁에서 빌리의 나이프가 자기 쪽을 향했다며 윽박지른다. 자기를 칼로 찌를 속셈이었느냐는 그의 말도 안되는 착각은 말리는 어머니의 태도로 보아 가정 전통으로 추정되고 빌리의 피해망상과 자기 보호 본능 역시 아버지가 만든 작품임을 추정할 수 있다.
어머니 역시 빌리에게 무성의하기는 매한가지다. 빌리에게 초콜릿 알레르기가 있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고 초콜릿 도넛을 권한다. 어머니는 빌리의 과거뿐만 아니라 현재에도 관심이 없다. 어머니는 버팔로 팀의 경기가 시작되자 빌리가 며느리라고 데려온 라일라가 무슨 말을 하든 일절 관심을 주지 않는다. 버팔로 팀이 패배하자 어머니는 그간 30년 동안 우승한 적이 없다며 버팔로 팀이 마지막으로 승리하던 날은 빌리를 출산하느라 보지 못했다고 한다. 빌리를 낳지 말았어야 한다는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라일라는 빌리에게 버팔로 팀을 좋아하느냐 묻는다. 라일라의 순수함은 오싹하다. 그녀는 빌리와 CIA에서 만나 사귀게 됐다는 거짓말이 통할 거라 믿고 그 거짓말을 그대로 실천하는 사람이다. 몇 번이나 납치극에서 도주할 기회가 있었는데도 빌리의 계획에 순순히 따라주는 모습은 총명하지 못한 어린아이 같다. 빌리처럼 그녀 역시 성장하지 못한 어른으로 보인다.
빌리의 아내 연기를 끝마친 라일라는 자유의 몸이 되었는데도 어째서인지 빌리와 동행하기를 원한다. 라일라는 빌리와 차를 타러 가는 도중 핫초코를 마시기 위해 식당으로 들어가고 운 나쁘게도 그곳에서 빌리의 첫사랑과 목도하고 만다. 그녀는 빌리가 보여준 전 애인 사진의 주인공이었다. 라일라는 이제 빌리와 그녀가 사귀지도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됐고 그가 과장해서 말한 여성 편력도 믿지 않는다. 그녀는 빌리가 어릴 적 첫사랑의 아픔에서 허우적대고 있음을 알고 과거에 얽매인 그를 치유하는데 다가선다. 라일라가 빌리의 과거사를 털어놓게 만들고 그를 이해하는 장면은 어머니가 자식의 걱정과 고민을 털어놓게 만드는 모습과 흡사하다. 결핍된 부모님의 사랑, 연정의 사랑을 불어넣는 라일라는 강아지 때문에 눈물 흘리는 어린 소년을 마침내 어른으로 성장시킨다.
버팔로 66 속 여성 캐릭터
라일라는 춤을 배우던 모습으로 보아 나름의 꿈도 가진 여성으로 보인다. 미래가 있는 라일라와 다르게 빌리는 오판이었다지만 사회적으로 범죄자 낙인이 찍힌 전과자다. 라일라와 빌리는 미녀와 야수 같은 관계다. 그 야수는 왕자로 변하지 않는 괴물이다. 라일라는 소년의 감옥에서 빌리를 구원한 운명의 상대지만 라일라의 운명도 과연 빌리일지 의문이 든다. 라일라는 어떻게 빌리를 사랑하게 된 걸까?
라일라는 환상 속에 사는 평면적인 여자다. 빌리에게는 살인에 관해 고심하는 장면이 있다. 빌리의 옆에 서 있는 라일라는 내적 갈등은 커녕 고차원적 사고를 할 줄 모르는 사람으로 비춰진다. 라일라는 빌리를 구원하기 위한 도구일 뿐이다. 캐릭터의 내면을 탐구해 봤자 우리가 원하는 답은 나오지 않는다. 우리는 판타지 속에 사는 여성을 보고 있다.
트위기처럼 푸른 눈화장을 한 라일라는 푸른 원피스를 입었다. 디즈니의 신데렐라가 신을 법한 하늘색 구두를 신은 라일라는 그 눈동자까지 하늘인 금발의 미인이다. 파란색에 갇힌 라일라는 영화에서 웃는 모습보다 뚱해 보이는 표정을 더 많이 짓고 있다.
영미권에서는 파랑을 우울의 색깔이라고 부른다. “I’m Blue.”는 우울하다는 뜻이다. 빌리와 라일라가 즉석사진기에서 사진을 찍을 때 빌리는 우울하니까 배경을 파란 커튼으로 바꾸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 파란색 커튼은 라일라가 입은 원피스와 색이 똑같다. 만약 영화 속에서 꾸준히 언급되는 파란색이 라일라의 우울한 상태를 암시하는 은유였다면 관객은 상상력을 발휘해 라일라의 서사를 머릿속에 그려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인생이 즐겁지 않은 라일라는 빌리가 외로움과 우울의 수렁에 갇히는 모습을 보고 동질감을 느꼈다. 그래서 자신이 당한 범죄도 무마시킬 만큼의 사랑에 빠졌다'고 말이다.
하지만 위와 같은 분석은 개연성이 부족하다. 무엇보다 영화 내에서 라일라의 과거를 비추어 주는 핵심적인 장면은 등장하지 않기 때문에 해석이라기보다는 추측에 더 가까운 의견이다. 라일라라는 캐릭터를 파고들면 파고들수록 그녀의 정체성은 더욱 모호해지고만 만다.
이제는 사랑을 구원할 차례
마침내 빌리는 권총을 들고 자신의 원수를 찾아간다. 저놈만 아니었으면. 저놈이 경기에서 공을 잡아 버팔로가 이겼더라면 남의 옥살이를 대신하면서까지 도박 빚을 갚지 않아도 됐을 텐데 저주하던 빌리는 영화 처음으로 과거 대신 미래를 생각한다. 그 미래는 원수를 총으로 쏘고 자신도 자살하는 미래다. 과거 회상 신이 스크린 가운데에서 나타나 현재가 진행되는 화면 전체를 삼켰다면 미래 신은 화면 전체를 덮은 걸로 시작해 화면 가운데로 점점 빨려 들어가 현재에서 소멸한다. 빌리는 자기를 기다리는 라일라가 현재 있음을 안다. 빌리는 라일라가 곁에 있는 자신이 원수보다 행복한 인간임을 깨닫고 그를 용서한다. 마침내 빌리는 과거에서 벗어나 현재를 살아가는 어른이 된 것이다. 라일라의 사랑을 통해서.
초콜릿 알레르기가 있는 남자가 여자를 위해 핫초코를 사러 가는 모습은 퍽 감동적이다. 라일라에게 쓰는 2달러도 아까워하던 빌리는 하트 쿠키도 산다. 여자 친구가 있다는 손님의 몫까지 챙기는 모습은 보는 이로 하여금 흐뭇한 미소를 짓게 만든다. 빌리가 사랑을 알고 공감하게 되었음을 나타내는 장면이다.
우리 또한 사랑에 빠진 빌리의 기쁨을 공감하지 않을 수 없다. 영화는 빌리와 라일라의 관계가 정상적인 관계가 아니더라도 마지막 5분을 통해 그들 사이의 사랑 역시 숭고한 사랑이라고 우리들의 고개를 끄덕이게 한다. 사랑은 우리들을 하나로 묶는 위대한 감정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다음과 같이 사고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이토록 대단한 감정인 사랑은 범죄 미화 영화나 여성을 남성의 도구로밖에 표현하지 못하는 영화에 쓰이기에는 아까운 감정이라고.
사랑은 지천으로 널린 흔한 감정이다. 사랑은 도덕성에서 벗어나거나 성별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더욱 고착시키는 작품에도 자유롭게 쓰이는 재료다. 그런 영화는 20년도 더 지난 98년도 작품이다. 우리는 1990년대를 지나쳐 왔다. 우리는 현재를 살아간다. 이미 과거가 돼 버린 예전 영화들을 볼 때 나는 그 영화에 실린 구시대적 사상이 현재를 집어 삼킬 수 없도록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과거는 말소될 수 없다. <버팔로 66> 같은 영화를 보거나 그것을 좋아하는 일은 말릴 수 없다. 우리가 막아서야 할 일은 <버팔로 66> 같은 영화가 현재에도 양산되는 일이다. 그것은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가 올바르게 영화를 사랑하는 방식이다. 또한 동시대를 살아가는 주변의 사람들을 사랑하는 길이며 가련한 사랑이 잘못에 대한 변명으로 악용당하지 못하게 사랑을 구원하는 방법이다.
[대서 홍수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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