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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나를 키운 성장소설 – 인간의 굴레에서

특별 수록

by 대서 2020. 8. 18. 2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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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바칼로레아 시험

 인생을 살면서 한 번쯤 이런 질문을 품게 될 때가 있다. 삶이란 무엇일까? 우리는 그 해답을 알기 위해 옛 철학자들의 흔적을 쫓고 학식 높은 사람들의 말을 귀담아듣는 건지 모른다. 그런데 인생이란 수학 문제처럼 이렇다 정해진 답이 없다는 게 문제다.

 프랑스 학생들은 대학에 입학하기 위해 바칼로레아라는 논술 시험을 친다. 이 논술 시험은 인문, 사회, 자연과학 항목으로 나뉘며 그중 인문 계열에서 세분화된 철학시험은 프랑스 지성을 가늠하는 잣대로 인식된단다. 몇 가지 흥미로워 보이는 시험 문제를 가져와 봤다.

 

‘불의를 느끼는 것이 정의를 알게 하는가?
‘대화가 진리에 이르는 길인가?
‘인간은 누군가에게 통치될 필요가 있는가?

 

 우리나라 대입 시험에도 필수는 아니지만 철학 시험이 있긴 있다. 사회탐구 영역 중 윤리와 사상, 생활과 윤리라는 과목이다. 수능 때 두 과목을 객관식 문항으로만 접해본 나에게 먼 나라가 철학을 대하는 태도는 생경하기만 했다. 답이 정해지지 않은 문제를 푸는 학생들의 심정은 막막할까 아니면 자유로울까? 글쎄, 모르긴 몰라도 대학 입시가 달린 시험인데 막막한 심정이 더 크지 않을까 마음대로 예상해 본다. 정해진 답은 없어도 더 ‘나은’ 답을 위해 사르트르나 푸코의 저서를 읽고 강의를 복습하는 학생들의 모습이 그려진다. 인생도 바칼로레아 시험과 같지 않을까. 정해진 답이 없어서 막막하기도, 자유롭기도 하지만 전자의 감정이 더 커서 더 ‘나은’ 삶을 살아가려는 사람들. 우리는 더 나은 답을 얻기 위해 지혜로운 사람들의 지성을 얻으려 한다.

 

몰입의 힘

 나는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해 책을 읽는 게 아니지만 “책에 인생의 길이 있다”라는 관용어에는 공감하는 바이다. 책은 다양한 기능을 가지고 있다. 새로운 정보를 전달해 주기도 하고 어떤 책은 그 자체로 글쓰기의 교본이 되기도 한다. 소설은 상상력을 키워주고 무료함에 갈증이 난 머리는 활자로 된 이야기를 읽으면 탄산수처럼 톡 쏘는 재미를 맛보기도 한다.

 책에 인생의 길이 있다는 말은 책의 기능 중 간접 경험에 초점을 맞춘 말일 것이다. 나는 <[연재] 나를 키운 성장소설 - 호밀밭의 파수꾼>에서 김연수 작가의 『시절 일기』를 인용하며 등장인물에 몰입할 수 있다면 책 읽는 일은 삶을 여러 번 사는 일과 비슷하다고 말했다. 책을 한 번 읽을 때마다 세 번의 인생을 경험하게 된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첫 번째로 1인칭 시점 소설을 읽을 때 독자가 책 속 등장인물과 자신을 동일시한다는 데에는 이견이 없을 것이다. 독자는 등장인물에 빙의하여 어린아이가 되기도 노인이 되기도 하며 작가가 준비해 놓은 일련의 사건들을 경험한다.

 작가를 작품 속 가상 인물과 동일인으로 상정하는 게 언제나 맞아떨어지는 가설은 아니지만 대체로 예술 작품은 작가가 살아온 삶의 총체에서 뻗어 나온 가지가 아닐 수 없다. 작가는 자신이 인생에서 겪은 바를 완전히 새로운 형식으로 창작하지 않고 언어를 빌려서 이미 타인에 의해 그 완전성이 확인된 방식으로 자신이 보고 들은 것들을 표현한다. 우리가 보는 작품 속에서 작가는 포토샵으로 이리저리 보정된 사진과 같다. 우리는 작가 삶의 원전을 읽을 수 없어도 그의 삶에서 파생된 텍스트를 통해 작가란 사람의 본질을 어렴풋이 유추한다. 이렇게 텍스트 저 건너편에 숨어있으면서 희미하고 뚜렷한 작가의 삶을 독자는 두 번째로 경험하게 된다.

 마지막으로, 독자는 텍스트의 의미를 곧이곧대로 수용하지 않고 자신의 견해와 비교·대조하는 비판적 읽기를 통해 작가도, 독자 자신도 예상하지 못했던 새로운 의미를 얻게 된다. 독자는 새로운 깨달음을 얻기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세 번째 삶은 독자가 책을 덮고 현실 세계를 바라본 그 순간 시작된다.

 위 같은 단계를 밟기 위해서는 먼저 몰입이 우선해야 한다. 그런데 도저히 책에 몰입할 수 없을 때가 있다. 등장인물에 전혀 공감할 수 없는 경우다. 알베르트 카뮈의 『이방인』에 나오는 주인공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아마 몇 없을 것이다.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라고 말하는 주인공은 현실에서 만나고 싶지 않은 매정한 사람으로 비춰진다. 내가 『이방인』을 처음 읽었을 때는 민음사 세계문학 전집을 하나하나 독파해 나가던 때였는데 상당히 고전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책의 내용이 어렵다기보다 주인공의 생각을 통 이해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사람마다 독서 습관에 차이는 있겠지만 나의 경우 주인공에 이입하기 쉬운 책들을 재밌게 읽는다. 서머싯 몸의 『인생의 굴레에서』는 두 권으로 분철돼 있는 분량을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읽게 만든 책이다.

 

인생은 페르시아 양탄자

 우리 동네 도서관에서 『인간의 굴레에서』는 청소년 도서로도 분류되어 있다. 보통 청소년 소설은 겨냥 독자들이 쉽게 공감할 수 있도록 주인공이 학생으로 등장한다는 특징이 있다. 『데미안』도 그렇고 『호밀 밭의 파수꾼』이 그렇다. 『인간의 굴레에서』는 주인공 필립의 유년 시절부터 청년기까지를 실감 나게 그려낸다. 청소년기의 필립은 모범생이기도 하다가 부모님과 선생님의 충고에 맞서 학업에 해이해지기도 하고 친구를 질투하기도 하면서 또래 아이들의 공감을 일으킨다. 하지만 다양한 연령대의 공감을 살 만한 대목은 필립이 인생이란 무엇일까 고민하는 장면이다.

 성인이 된 필립은 친구들을 사귀면서 자신만의 지적 세계를 넓혀간다. 그들의 관심사는 철학과 예술 그리고 인생이다. 어느 날 필립은 시인 크론쇼에게 인생이 무엇이냐고 묻는다. 그러자 크론쇼는 시인답게 인생은 페르시아 양탄자라는 수수께끼 같은 말을 내놓는다. 인생이 페르시아 양탄자라니, 과연 무슨 뜻일까? 필립은 그 해답을 크론쇼가 죽은 후 불현듯 떠올린다. 허탈하게도 인생에는 아무런 뜻이 없다는 게 정답이다. 이윽고 필립은 생각한다. “사람은 태어나서, 고생하다, 죽는다. 인생에는 아무런 뜻이 없었다. 사람의 삶에 무슨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람이 태어난다거나 태어나지 않는다거나, 산다거나 죽는다거나 하는 것은 조금도 중요한 일이 아니다(365p)”라고. 우리는 “우주의 역사에서 아주 짧은 순간, 지구의 표면을 점유하고 있는 바글대는 인간 집단 가운데 아주 하찮은 생물에 지나지 않는다(365p).

 페르시아 양탄자는 화려한 무늬가 특징이다. 필립은 크론쇼의 말마따나 사람들은 저마다 인생이라는 양탄자를 짜고 있다고 생각한다. 가장 아름다운 무늬를 가진 양탄자가 있다는 사실은 변함없지만 우리는 행복이 없는 무늬, 성공을 추구하지 않는 무늬에서도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다. 전쟁에서 허무하게 죽어버린 헤이워드의 삶도 평생을 가난한 무명 시인으로 살다 간 크론쇼의 삶에서도 미학을 찾아볼 수 있는 것이다. 화려한 꽃뿐만 아니라 꽃을 지탱하는 줄기에서도 아름다움을 찾는 심미안을 기르기 위해서는 미에 대한 기존의 척도를 버려야 한다. 우리가 더 나은 인생을 생각할 때 머릿속에 떠올리는 규정을 버리면 삶의 부담에서 가벼워질 수 있을 것이다. 인생에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필립에 대한 묘사는 환희로 가득 차 있다.

 

허무가 말하는 자유

 서머싯 몸의 대표작은 『달과 6펜스』로 뽑히지만 나는 『달과 6펜스』 보다 『인간의 굴레에서』를 더 좋아한다. 그 이유는 소설이 평범한 허무주의를 표상하지 않기 때문이다. 인생에 아무 의미가 없다는 말은 자칫 비관적으로 들리기 쉽다. 인생에 아무 의미가 없다면 열심히 공부해야 할 이유도 매 순간 노력해야 할 이유도 사라진다는 생각이 들기 마련이다. 그런데 깨달음을 얻은 후 필립의 행적은 허무주의자가 할 법한 행동과는 정반대로 흘러간다. 낙제만 하던 시험에서 합격한 후 의사가 되고 궁핍한 생활에서 벗어난다. 자신을 이용하려던 속물적인 애인에게 벗어나 진정한 사랑을 만나기도 한다.

 필립의 삶은 그곳에 ‘아무것도 없음’을 알아차릴 때마다 새로워진다. 신학자 숙부 밑에서 자란 필립은 1권에서 사실 신이 없다는 걸 알아차리고 마음의 자유를 찾는다. 이는 훗날 성인이 된 필립이 예술 학 도 친구들의 말에 휘둘리다 드넓은 우주에서 인생이란 아무 의미도 지니지 않는다는 진리를 2권에서 깨우치는 장면과 오버랩된다. 허무를 알아차릴 때마다 필립은 자기 인생의 주인이 되어간다. 아래는 무신론에 관한 신형철 평론가의 칼럼과 광활한 우주에서 인간이 가져야 할 태도를 서술한 칼 세이건의 『창백한 푸른 점』에서 각각 발췌한 내용이다.

 

“나는 인간이 신 없이 종교적일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일지를 생각하는 무신론자인데, 나에게 그 무엇보다 종교적인 사건은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의 곁에 있겠다고, 그의 곁을 떠나지 않겠다고 결심하는 일이다. 내가 생각하는 무신론자는 신이 없다는 증거를 손에 쥐고 환호하는 사람이 아니라, 신이 없기 때문에 그 대신 한 인간이 다른 한 인간의 곁에 있을 수밖에 없다고, 이 세상의 한 인간은 다른 한 인간을 향한 사랑을 발명해낼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나는 신이 아니라 이 생각을 믿는다.(신형철, “무정한 신 아래에서 사랑을 발명하다”, 한겨레, 2016.8.12.)

 

“여기 있다. 여기가 우리의 고향이다. 이곳이 우리다. 우리가 사랑하는 모든 이들,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사람들, 당신이 들어 봤을 모든 사람들, 예전에 있었던 모든 사람들이 이곳에서 삶을 누렸다. 우리의 모든 즐거움과 고통들, 확신에 찬 수많은 종교, 이데올로기들, 경제 독트린들, 모든 사냥꾼과 약탈자, 모든 영웅과 비겁자, 문명의 창조자와 파괴자, 왕과 농부, 사랑에 빠진 젊은 연인들, 모든 아버지와 어머니들, 희망에 찬 아이들, 발명가와 탐험가, 모든 도덕 교사들, 모든 타락한 정치인들, 모든 슈퍼스타, 모든 최고 지도자들, 인간역사 속이 모든 성인과 죄인들이 여기 태양 빛 속에 부유하는 먼지의 티끌 위에서 살았던 것이다. (중략) 우리가 사는 이곳은 암흑 속 외로운 얼룩일 뿐이다. 이 광활한 어둠 속의 다른 어딘 가에 우리를 구해줄 무언가가 과연 있을까. 사진을 보고도 그런 생각이 들까? 우리의 작은 세계를 찍은 이 사진보다, 우리의 오만함을 쉽게 보여주는 것이 존재할까? 이 창백한 푸른 점보다, 우리가 아는 유일한 고향을 소중하게 다루고, 서로를 따뜻하게 대해야 한다는 책임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이 있을까?(칼 세이건, 『창백한 푸른 점』, 사이언스북스, 2001.)

 

 허무는 삶의 가치를 부정하지 않는다. 두 글은 허무함 속에서 삶에 대한 사랑을 호소하는 글이다. “무정한 신 아래서 사랑을 발명하다”는 신을 믿지 않는 사람이 가질 수 있는 최선의 신앙을, 『창백한 푸른 점』은 티끌 같은 지구에서 일어날 수 있는 가장 큰 미래를 말하면서 인생을 희망한다. 『인간의 굴레에서』도 허무에서 희망을 끌어올린다. 아무것에도 의미가 없다면 우리는 타인이 만든 정론의 삶을 벗어나 자유로워질 수 있다. 허무는 자유의 가능성을 바라본다. 행복과 명예, 성공 같은 덕목은 형이상학적이고 추상적이다. 우리에게 분명한 건 내가 살아있는 이 순간, 오롯이 나의 것이라고 할 수 있는 현재뿐이다.

“생각해 보면 그는 그 동안 남의 말과 글이 주입해 온 이상을 좇아왔을 뿐 제 마음의 욕망을 따른 적 이 한번도 없었던 것 같다. 자신의 행로는 언제나 어떤 것을 해야 한다는 의무감에 좌우되었을 뿐 마음이 진정 원하는 바를 따른 적이 없었다. 초조한 마음으로 그는 이 모든 거짓을 내던져버렸다. 그는 지금까지 미래만을 염두에 두고 살아왔다. 그래서 현재는 늘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버리고 말았다. 자신의 이상? 그는 의미없는 삶의 무수한 사실들로 복잡하고 아름다운 무늬를 짜고 싶었다(502p).

 삶에는 정답도 의미도 없고 현재만이 있다. 우리가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해 찾아보는 수많은 조언들은 체화되는 것도 있고 나를 옭아매고 내가 바라는 이상인 척 꾸며지는 것들이 있다. 『인간의 굴레에서』는 1,000페이지 분량 동안 필립이 나이고, 내가 필립이 되는 경험을 선사하면서 인생이란 바칼로레아 시험에서 막막함보다 자유를 만끽하라고 우리에게 말한다.

 

 

[대서 홍수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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