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연재] 나를 키운 성장 소설 – 호밀밭의 파수꾼

특별 수록

by 대서 2020. 7. 15. 15:56

본문

호밀밭의 파수꾼을 다시 읽으며

 몇 달 전에는 안토니오 스카르메타 작가의 『네루다의 우편배달부』를 읽었다. 동네 도서관이 코로나 19의 여파로 휴관하기 전에 대출한 책이었으니 완독한 지도 벌써 한참이나 흘렀다.

 내가 몇 개월 전에 읽은 『네루다의 우편배달부』를 기억하는 이유는 그 책의 교훈이 특별히 나에게 깊은 울림을 주었기 때문이 아니다. 그 책이 나의 머릿속에 각인된 이유는 첫 번째로 『네루다의 우편배달부』에 나오는 등장인물 중 한 명이 실제 시인인 파블로 네루다를 모티프로 창작되었다는 점이 흥미로웠기 때문에, 그리고 그 흥미 때문에 찾아본 실제 시인의 시가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다. 카프카는 책은 얼어붙은 바다를 깨부수는 도끼여야 한다고 말했다. 그 시는 동심에 대한 내 얼어붙은 기억을 깨부수는 글이었고 나는 곧장 그 시를 핸드폰 메모장에 받아 적기 시작했다. 내게 『네루다의 우편배달부』란 책은 페이지 끝에서 시작되는 이야기였던 것이다. 파블로 네루다의 시 일부분을 발췌해 본다.

나였던 그 아이는 어디 있을까. 아직 내 속에 있을까 아니면 사라졌을까? - 질문의 책, 파블로 네루다, 63p.

 

 그리고 며칠 전 『호밀밭의 파수꾼』을 다시 읽다가 이와 비슷한 대목이 있어서 깜짝 놀라고 말았다.

저기요, 아저씨. 센트럴 파크 남쪽에 오리가 있는 연못 아시죠? 왜 조그만 연못 있잖아요. 그 연못이 얼면 오리들은 어디로 가는지 혹시 알고 계세요? - 호밀밭의 파수꾼, J. D. 샐린저, 85p.

 

 시야에 있었다가 없어지는 것들, 분명히 내 안에 존재하고 있었다가 어느 순간 증발해 버리는 순수함은 과연 어디로 가버리는 것일까? 명확한 해답일 수는 없겠지만, 책을 읽고 내 나름의 결론을 내려보았다. 그 결론을 말해버리기 전에 책에 관한 명언을 한 가지 더 소개하고 싶다.

한 번의 삶은 살아보지 못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러니 이 인생의 의미를 알아내려면 적어도 두 번의 삶은 필요하다. (중략)… 우리는 글을 쓰는 행위를 통해 한 번 더 살 수 있다. - 시절일기, 김연수, 19p.

 정확히는 글 쓰는 행위에 대한 말이지만 책 읽는 일도 인생을 한 번 더 사는 일과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호밀밭의 파수꾼』을 읽지 않는다면 우리가 언제 또 인생에서 퇴학과 그로 인한 사흘 동안의 방황을 간접 경험할 수 있겠는가? 책 속의 주인공 홀든 콜필드에게 완전히 몰입할 수만 있다면 우리는 다른 사람의 인생을 한 번 더 살아볼 수 있는 것이다. 어른에게는 청소년 시기를 다시 소환해 볼 수 있는 기회를, 학생들에게는 일탈이 있는 삶을 제공하는 『호밀밭의 파수꾼』은 순수에게 작별을 고하는 소설이다.

 

호밀밭의 파수꾼을 둘러싼 오해

 주변에서 『호밀밭의 파수꾼』을 재밌게 읽었다는 사람을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중학교 3학년 때 처음 이 책을 읽고 나서 마치 좋은 친구를 만난 듯 여러 사람에게 소개하고 다닌 적이 있었다. 좋아하는 주제를 함께 사랑해 주는 사람이 있다는 일은 기쁜 일이다. 특히 그 주제가 책이 된다면 이보다 더 훌륭한 대화 소재는 없다. 『호밀밭의 파수꾼』을 주제로 한 대화는 원만하게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말이다. 또래 친구들은 의식의 흐름을 방불케 하는 문체 때문에 책을 끝까지 읽지 못했다고 하였고, 내가 존경하는 어른들은 책 내용에 공감이 가지 않는다고 말했다.

 『어린왕자』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어른들은 숫자를 좋아하는 것이다. (중략)… 만약 어른들에게 창가에 제라늄 화분이 놓여 있고 지붕에는 비둘기들이 놀고 있는 멋진 붉은 벽돌집을 보았어요.라고 말하면 어른들은 그 집이 어떤 집인지를 상상해내지 못한다. 어른들에게는 십만 프랑짜리 집을 보았어요.라고 해야 한다. - 어린왕자,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 43p.

 『호밀밭의 파수꾼』도 홀든 콜필드의 입을 빌려 속물적인 세상을 비판한다. 콜필드에게 자동차의 연비, 가식적인 인사말, 할리우드 영화 같은 허례허식들은 견디기 힘든 것들이다.

 『호밀밭의 파수꾼』과 파블로 네루다의 시와 『어린왕자』는 모두 똑같은 주제를 공유하고 있다. 그러나 파블로 네루다의 시가 교보문고의 전광판 문구로 채택된 것에 비해서, 『어린왕자』가 성인을 위한 동화책으로 불리는 데에 비해서, 『호밀밭의 파수꾼』에 대한 어른들의 대우는 비참하다. 그 이유는 아마 『호밀밭의 파수꾼』 16살의 관점에서 기성 어른들을 감화시키고 설득하려 하기보다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당시 많은 학부모가 자식들이 『호밀밭의 파수꾼』을 읽는 일을 두려워했다고 한다. 과목에서 낙제점을 받고 술과 담배를 하며 세상에 반항적인 문제아에 아이들이 매혹당하지 않을까 어른들은 염려했다. 많은 고등학교 도서관에서 『호밀밭의 파수꾼』은 금서로 지정되었었다. 『호밀밭의 파수꾼』을 표면적으로 해석한 결과다. 비속어와 신성모독에 감추어진 콜필드는 그 무엇보다도 순수를 지키려 했던 아이였다. 콜필드는 여동생의 학교 벽면에 쓰여진 외설적인 욕을 보고 분노한다. 동생처럼 어린아이들이 욕설을 보고 그 뜻을 알게 될까 걱정스럽기 때문이다. 콜필드는 그 욕설을 지우지만 나중에 가서는 칼로 새겨진 지울 수 없는 욕설을 보게 된다. 칼로 쓰인 욕설은 아이들을 보호하려는 콜필드의 노력을 무용으로 만들어 버린다. 콜필드는 지울 수 없는 낙서, 즉 자신의 노력으로 바꿀 수 없고 순응해야 하는 사회가 있음을 알고 있다.

호밀밭의 파수꾼 표지

 

성난 젊은이들과 비트운동

 기성세대한테는 위협적인 소설일지라도 기성세대에 맞서는 신세대들에게 『호밀밭의 파수꾼』은 성전과도 같은 책이었다. 『호밀밭의 파수꾼』은 1950년대 중후반에 일어난 반체제 움직임인 미국의 비트 운동과 영국의 진보 그룹 성난 젊은이들의 기폭제가 되었던 것이다.

 미국의 1950년대는 사회적 순응의 시대였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인들은 평화와 안정을 선택했고 1952년에 평화와 번영을 약속한 공화당의 아이젠하워를 대통령으로 선출했다.[1]

 1950년대 중산층들의 모습은 화려했다. 잔디밭에서 파티를 열고, 새로운 가전제품을 구입했다. 미국인들은 가정과 교회를 중시했다. 이러한 경제적 풍요는 정치적 통제와의 등가교환을 통해 얻어진 것이었다. 사람들은 정치적 우파만을 지지했고, 정상적인 그룹과 부합하지 않는 사람들을 감시하고 억압했다.

 『호밀밭의 파수꾼』은 그런 부조리의 시대에 정면으로 부딪치기를 마다하지 않았다. 『호밀밭의 파수꾼』이 물질적 풍요의 시대에 정신적 빈곤을 고발한 반문화의 원조라 불리는 까닭은 여기에 있다.[2] 콜필드가 부자들의 자녀들만 다니는 시립 고등학교에서 퇴학당한 뒤 당당하게 학교를 떠나는 장면은 샐린저의 도전 정신을 단면적으로 보여준다.

 화려한 뉴욕을 비꼬려는 듯, 위선과 가식뿐인 세상에서 콜필드가 느끼는 감정을 대변하려는 듯 어두운 밤거리에서 전개되는 이야기에 등장하는 인물은 하나같이 속물적인 어른들이다. 화려한 영화배우의 꽁무니를 쫓는 마티와 사기 행각을 벌이는 모리스, 자애로운 척 제자를 성추행하는 교사는 속물적 기성세대의 표상이다. 콜필드의 거칠 것 없이 솔직한 표현과 사회적으로 터부시되었던 비속어의 사용은 기성 세대에 대한 젊은이의 저항이었다.

 1950년대 미국 사회는 외견상으로는 모든 게 정상인 것처럼 흘러갔지만 내면은 붕괴하고 있었다. 전쟁 이후 사람들은 인류가 한순간에 사라질 수 있음을 깨달았다. 인간은 자신의 무력함과 나약함 앞에서 의미 있는 것은 바로 지금 이 순간 뿐임을 느꼈다. 내일이 보장되지 못하는 상황에서는 공부나 직장 역시 아무런 의의를 갖지 못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허위와 기만의 삶은 당면한 현실을 못 본 체 외면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호밀밭의 파수꾼』은 콜필드가 그랬던 것처럼 거리로 나와 끊임없이 방황하기를 장려한다. 비트 세대와 성난 젊은이들은 그렇게 탄생했다. 2020년의 한국 사회는 어떤가? 속물성과 가식에 저항하는 성난 젊은이들이 있는가?

 대부분의 사람은 부조리에 순응하고 살아가기를 택한다. 잘못된 걸 알면서도 그것을 고치려는 시도를 하지 않는 것이다. 개혁은 많은 수고와 노력을 필요로 한다. 그에 따른 위험과 낙담은 사회가 책임져 주지 않는다. 전복에 실패한다면 사람들에게 규탄받게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존재한다. 남들과 똑같이 가면을 쓰고 물질을 우선 수위에 두고 살아간다면 사회적 인정과 안정적인 삶이 뒤따라올 텐데, 수고로움을 사서 할 필요가 무엇이냐는 생각이 젊은이들을 지배한다. 완고한 사회 구조는 혁명에 무너지기보다 순응에 단단해져 가고 있다.

 

오리들 떠나보내기

 홀든 콜필드가 뉴욕의 거리를 돌아다니면서, 성난 젊은이들이 체제 전복을 기원하면서 꿨던 그 열정적인 꿈은 무엇을 지키기 위한 꿈인가? 그것은 순수에 대한 꿈이었다. 콜필드는 청소년이 가면 안 되는 주점에도 들어가 보고, 바에서 여자들과 춤을 춘다. 퇴폐적인 공간에서 끊임없이 방황하는 콜필드의 행태는 분명 역동적인 이미지지만 그가 혼란 끝에 당도한 안락의 공간은 변치 않는 정체된 이미지로 표현된다.

그렇지만 이 박물관에서 가장 좋은 건 아무것도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제자리에 있다는 것이다. 누구도 자기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는다. 이를테면 10만 번을 보더라도 에스키모는 여전히 물고기 두 마리를 낚은 채 계속 낚시를 하고 있을 것이고, 새는 여전히 남쪽으로 날아가고 있을 것이다. - 호밀밭의 파수꾼, J. D. 샐린저, 165p.

 콜필드가 초등학생 때 보았던 박물관의 조형물은 그가 16살이 된 지금도 그대로다. 콜필드가 그랬던 것처럼 아이들은 박물관을 드나들고 있다. 가식적인 세상 속에서 아이들만은 진실하고 정직하다. 콜필드는 어른들과 다른 아이들의 순수함을 동경한다. 염세적인 콜필드의 온화한 면은 그가 여동생 피비를 비롯한 어린아이들을 대할 때 돋보인다. 그는 아이들이 절벽에서 떨어질 것 같으면, 재빨리 붙잡아 주는 호밀밭의 파수꾼이 되고 싶다고 생각한다.

 콜필드는 미라를 찾는 아이들에게 길 안내를 해주지만 아이들은 박물관의 무서운 분위기에 달아나버리고 만다. 시소를 타는 아이들이 무게 중심을 잘 잡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콜필드를 아이들은 싫어하는 기색을 내비친다. 스케이트 신발 끈을 묶어 주면서 코코아를 권하는 콜필드의 제안을 거절하는 아이도 있었다. 콜필드는 아이들의 순수함과 공명하고 교감하기에는 너무 먼 길을 떠나와 있는 상태였다. 허세와 가식으로 가득 찬 세상을 혐오하지만 콜필드의 특기는 거짓말이다. 배우들을 싫어하면서 영화 속 한 장면을 흉내 내거나 여자 친구를 위해 연극을 예매하기도 한다. 콜필드의 내면은 어릴 적 순수함을 뒤로하고 점점 그가 경멸하던 어른의 세상 속으로 한 발자국 나아가고 있던 것이다. 콜필드가 박물관 앞에서 갑자기 입장을 주저하던 이유도 합리적으로 설명될 수 있다. 태동하는 젊은이는 멈추어 있는 환상 속에 갇혀있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는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결국 콜필드는 도시를 떠나 자연의 오두막집에서 사는 꿈을 이루지 못한다. 콜필드는 새로운 학교로 전학을 가기로 한다. 성난 젊은이들이 사라진 것처럼 콜필드도 사회의 체제에 굴복하게 된다. 그렇게 콜필드도 어른이 된다. 어른이 되는 순간은 상실의 순간을 의미하기도 한다. 내가 지키려고 노력한 위태롭고도 안락한 세계를 부수어야 어른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헤르만 헤세는 『데미안』에서 태어나려고 하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고 말한다. 콜필드는 동심의 껍질을 깨뜨린 뒤로, 혐오해 마지않았던 사람들을 그리워하게 된다. 조소로 가득 차 있던 그가 마지막 장에서 내가 알고 있는 건, 이 이야기에서 언급했던 사람들이 보고 싶다는 것뿐. (중략)… 말을 하게 되면, 모든 사람들이 그리워지기 시작하니까라고 말한 이유는 순수를 잃은 대신 이해하는 방법을 알게 됐기 때문이다. 콜필드는 그가 집착하던 세계를 부수고 방황에 종지부를 맺었다. 책의 열린 결말은 그가 새로운 세상을 향해 날갯짓하는 모습을 독자의 상상에 맡긴다.

 

작별했던 순수와 다시 만날 날을 고대하며

 그러므로 상실이 언제나 공백을 뜻하는 건 아니다. 무엇이 떠나가고 비워진 자리에는 새로운 깨달음이 채워지게 된다. 어른이 된다는 일은 두려운 일이 아니다. 우리는 순수에게 작별을 고할 수 있어야 한다. 연못이 얼면 떠나는 오리들을 막을 수 없는 것처럼. 그 오리들은 어느 봄날 연못이 녹는 날에 다시 찾아올 것이다. 누군가에게는 『어린왕자』가 누군가에게는 파블로 네루다의 시가, 내게는 『호밀밭의 파수꾼』이 그 연못을 녹이는 봄이다. 책을 다시 읽을 때마다 『호밀밭의 파수꾼』에 대한 나의 감상은 변하는 법이 없다. 세상에 물들지 않으려 했던, 나만의 순수함을 지키려 했던 그 시절이 마음속에 다시 찾아오곤 한다. 순수함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것은 문학 작품 속에 잠들었다가 다시 돌아오는 것이다. 정말로, 책을 읽는 일은 인생을 여러 번 사는 일과 같다. 훗날 『호밀밭의 파수꾼』을 다시 펼쳐 들었을 때 콜필드에게 더는 공감할 수 없다면 그때의 내 영혼은 아마 명을 달리했을 것이다.

 나는 세상과 타협하며 살아가는 어른이 될지도 모른다. 내 솔직한 감정을 말하지 못하고 애써 표정을 꾸며가며 동의하지도 않는 말에 찬성할 것이다. 어쩌면 인생의 최고 가치를 돈으로 상정하게 될지도 모른다. 이런 생각들은 고등학생 때부터 품어온 불안함이었다. 외톨이가 될까 봐 좋아하지도 않는 친구들의 말을 들어주고 진심 섞이지 않은 빈말을 해가며 인간관계를 이어 나갔다. 수시를 준비하던 나는 생활기록부에 좋은 말을 채워 넣기 위해 별로 존경하지 않은 선생님도 따랐다. 책을 처음 읽은 중학생 때는 콜필드를 분신처럼 생각했었지만 현실의 나 역시 속물적인 사람에 지나지 않았었다. 학창 시절은 어두운 동굴 같았다.

 며칠 전에 그 어두운 동굴을 함께 지나온 친구와 오랫동안 연락을 했다. 친구와 웃으면서 이야기를 나누니 아이러니하게도, 그토록 힘들었던 시절이 지금까지의 내 인생에서 가장 즐거웠던 경험인 것처럼 느껴졌다. 많은 사람들이 보고 싶어졌다. 그제야 나는 『호밀밭의 파수꾼』의 마지막 장면을 이해할 수 있었다. 콜필드의 세상을 향한 싫증과 순수에 대한 열망만을 공감했었던 이전과 달리, 이제는 평범한 어른이 되어도 괜찮을 것 같다는 안심이 들었다. 철새처럼 외출했던 순수함이 다시 돌아온다면 나는 내가 되고자 했던 모습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호밀밭의 파수꾼』은 비틀비틀 인생을 걸어가는 내 손을 잡아준다. 콜필드에게 내년에도 잘 부탁한다는 인사를 하고 싶다.

 

 

[대서 홍수빈]


 

[1] 김성곤, J. D. 샐린저와 호밀밭의 파수꾼』, 살림, 2005, 19.

[2] 김성곤, 위의 책, 15.

관련글 더보기

댓글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