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에슈코틀레에서 키엘체로 가는 도로까지 이어지는 고시치니에츠의 길가에는 보리수가 줄지어 자라고 있다. 인간들은 항상 보리수 그늘 밑을 오간다. 보리수의 시간 속에서 인간은 마치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 마냥 영원하다.
인간이 자연에게 영원한 것처럼 자연도 인간에게 영원하다. 사람의 눈 속에서 자연은 순환하는 계절을 따라 시듦과 피어남을 반복하며 항상 제자리를 지킨다.
자연은 그들이 시간과 죽음의 속박으로부터 자유로움을 알고 있다. 존재에 대한 무지 덕분이다. 반대로 인간은 자기 자신이 여기 존재하고 있음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인간은 외부의 경험을 통해 내면의 자아를 확립함으로써 자신만의 고유한 존재를 가진다. 인간은 영원히 살 수 없다.
‘나무의 입장에서 인간은 영원하다. 그들은 고시치니에츠의 길가에서 항상 보리수 그늘 밑을 오가고 있다. 나무가 보기에 그것은 정체도, 움직임도 아니다. 인간은 영원히 그 자리에 있다. 다시 말해 아예 존재한 적이 없었던 것처럼 늘 똑같은 모습으로 비친다.
(중략)
나무가 죽으면, 아무런 의미도 감흥도 없는 그의 꿈은 다른 나무에게 전달된다. 그렇기에 나무는 절대로 죽지 않는다. 존재에 대한 무지가 나무를 시간과 죽음의 속박으로부터 자유롭게 해 주기 때문이다.’ - 276p
태고는 백강과 흑강이 흐르는 작은 시골 마을이다. 태고도 사람이 사는 곳인지라 방앗간, 주점, 병원이 들어서 있기는 하지만 발달한 도시의 이미지보다 강과 숲, 새들이 살아있는 목가적이고 신비로운 분위기를 풍긴다. 마을을 둘러싼 미로 같은 숲에 갇혀 괴물이 된 사람의 이야기나 식물의 힘으로 아이를 잉태한 크워스카의 이야기는 태고의 영험한 힘을 보여준다. ‘아주 먼 옛날’이라는 뜻을 가진 마을답게 태고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신화나 전설과 비슷한 성격을 띠고 있다.
하지만 <태고의 시간들>을 그저 환상 소설로 분류할 수는 없을 것이다. <태고의 시간들>이 단순히 비현실적 요소를 강조한 환상 소설에 지나지 않았다면 지금과 같은 명예를 얻기 어려웠을 것이라 생각한다. <태고의 시간들>이 자국 내에서 영예로운 문학상을 수여하고 해외에도 그 명성을 떨칠 수 있었던 이유는 책 한 권 안에 표현의 정점을 보여줬기 때문이지 않을까 예측해 본다. 올가 토카르축은 365페이지 내에 신과 인간, 환상과 역사 심지어는 생명과 무생물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다. 게다가 작가는 단순히 그들을 관찰하고 기록하는 데에만 그치지 않는다. 과연 작가는 그들을 어떻게 표현하고 있을까? 이에 대한 대답은 서평의 마지막 문단에서 알아보도록 하자.
역사를 바꾸는 사람들과 바뀐 역사를 살아가는 사람들
아널드 토인비는 문명이 발달하기 위해 창조적 소수자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창조적 소수자는 도전에 맞서는 사람을 뜻한다. 도전은 홍수, 지진 같은 자연재해가 될 수도 있고 사회문제가 될 수도 있다.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창조적 소수자들을 역사를 새로 쓴 사람들이라고 말한다. 우리가 교과서에서 자주 본 세종대왕, 와트, 나폴레옹 같은 위인전 주인공들이 바로 창조적 소수자인 셈이다.
토인비는 여기에 덧붙여 대중들이 창조적 소수자를 모방해야 문명이 발달할 수 있다고 말한다. 국민들이 혜안을 가진 뛰어난 지도자를 따를 때, 주도자의 뜻과 합일하는 시민들이 혁명의 불씨를 타고 거리로 뛰쳐나올 때, 역사는 변환을 맞이한다. 이때의 역사는 각성한 개인을 필요로 하는 데 반해 바뀐 역사는 천재를 가리지 않고 모든 범인들을 필요로 한다.
역사의 바람은 정치와 무관한 사람들이 사는 작은 태고 마을까지 관여한다. <태고의 시간들>은 소시민일 뿐이었던 사람들의 삶이 그들은 불참여했던 역사의 변화에 어떻게 비극을 맞는지 보여주면서 신화적 환상과 현실의 경계를 포개 놓는다.. 게노베파는 남편 미하우가 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한 세월 동안 홀로 딸아이를 기른다. 마을 사람들은 병사들이 유대인을 잔인하게 학살하는 장면에 충격을 받는다. 이지도르는 영문도 모른 채 정치범이란 누명을 쓴다. 이네들은 현실을 뒤바꿀 지혜와 재능을 가진 창조적 소수자가 아니다. 이들은 교과서에 기록되지 않는 사람들이다.
삶의 시간이 만든 태고의 시간들
<태고의 시간들>은 버섯균과 보리수, 까마귀들에 대한 이야기도 담고 있지만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백년의 고독>, 이사벨 아옌데의 <영혼의 집> 같은 3대에 걸친 가문 소설로 읽어도 무방하다. 참혹한 역사의 한 시대를 배경으로 게노베파와 미하우, 미시아와 그의 딸 아델카로 흐르는 대서사시는 고통스러운 시간 속에서도 삶은 흘러간다고 말한다. 그 삶은 현대의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과 별반 다를 게 없다. 책 속의 인물들은 이별하고 배신하고 사랑하고 증오하는 인생을 산다. 그들은 일상에서 마주하는 사건들을 묵묵히 살아내고 쉽게 감정에 흔들린다. 주어진 삶에 울고 웃고 분노하고 배신하는 그들은 다른 사람의 또 다른 희로애락이 되기도 한다.
<태고의 시간들>에서는 모든 존재들이 수평을 이루고 있다. 올가 토카르축은 각개 물체들을 관찰해서 그것들을 하나의 존재로 표현하는 데에 이른다. 소설 속에서 신은 인간성을 가진 존재로 묘사된다. 데메테르와 페르세포네 신화에서 모티프를 얻은 신비로운 등장인물들은 2차 세계대전의 피해자로 그려지면서 현실성을 갖게 된다. 보잘것없는 커피 그라인더는 오랜 세월이 흐른 마지막 장까지 인간과 함께 대미를 장식한다. 마찬가지로 인간과 자연은 별개의 존재가 아니다. 자연이 계절이 바뀔 때마다 새 꽃을 피워내듯 인간은 새로운 세대를 통해 인간의 삶을 끊임없이 재생시킨다. 아델카가 그의 엄마 미시아가 그랬던 것처럼 커피 그라인더의 손잡이를 돌리는 결말은 그들의 삶이 모습만 바뀌어 영원히 살아갈 미래를 보여준다. 보리수가 인간들을 영원의 존재로 바라볼 수 있는 이유다.
태고의 시간은 함께 웃고 눈물 흘리고 분개하고 다시 사랑한다는 그다지 특별할 것 없는 인생들이 과거에서부터 무수히 누적된 하나의 기록이다. 소설이 된 태고는 ‘사람들이 살아온 무채색의 시간’을 새롭게 뜻하게 되면서 가장 현실적인 신화를 우리에게 말해준다. <태고의 시간들>은 역사가 기록하지 않은 평범한 사람들의 삶을 그렇게 전설로 만든다.
‘보데니차 숲 근처를 지나가면서 아델카는 손수건을 꺼내어 이탈리아제 구두를 닦고, 머리를 매만졌다. 아델카는 그로부터 한 시간 동안이나 버스를 기다리며, 정류장에 앉아 있었다. 버스에 올라타니 승객은 아델카 혼자뿐이었다. 그녀는 가방을 열어 그라인더를 꺼냈다. 그리고 천천히 손잡이를 돌리기 시작했다. 운전기사가 이상하다는 듯 백미러를 통해 아델카를 흘끔거렸다.’ - 364p
[대서 홍수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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